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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장은 고문체를 사용하면서도 유려하고 정제되어 있어 고려 문학사에서도 높이 평가 받아요. 최해는 교육에도 힘써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그의 문하에서 훗날 조선의 사대부 정신을 이끈 인재들이 여럿 배출 되었어요. 그는 고려의 유학이 단순한 정치 이념을 넘어서 인간의 도리와 사회 윤리를 근간으로 삼는 철학으로 나아가게 만든 사상적 선구자 였어요. 또한 최해는 학문적 태도에 있어서도 형식보다는 실천과 수양을 중시하였으며, 학문을 통한 자기 수양과 사회 개혁의 일치를 강조 했어요. 충혜왕 대에는 조정의 혼란을 개탄하며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몰두 했고 정치적으로는 현실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았어요. 그는 말년에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에 전념하다가 1340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사후에는 조선조에 들어와 성리학의 태두로서 추앙받았으며, 문묘에 종사되기도 했어요. 그는 단순한 문신이나 유학자를 넘어서 고려 말기 변화의 흐름을 예견하고 학문과 실천을 통해 시대를 이끌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으며, 그의 사상은 조선 성리학의 기틀 형성과 사대부 문화를 정립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최해는 고통스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도 올곧은 학문과 도덕적 자세를 견지하며 시대를 성찰했고, 그가 남긴 문집과 사상은 이후 수백 년간 한국 지성사에 큰 유산으로 남아있어요. 고려 후기의 지식인상이자 조선 성리학의 원류로서, 최해의 업적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사상과 학문의 모범으로 평가 받아요.